 |
|
|
Untitled Document
|
|
 |
홈으로
> 장봉도 > 장봉도 유래 |
|
|
| |
|
|
| |
장봉도에는 신석기시대 전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시대에는 강화현의 속현인
진강현에 속하였다가 조선시대에는 강화도호부에 속했고 1717년에 수군의 진이 설치되어 교동의
통어영에 속하게 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에 의해 장봉진이 폐지되자 장봉도,시도,모도 등 북도면 지역은 모두 강화군
제도면에 속하게 되었다. |
|
| |
| |
이 같은 행정구역은 1909년과 1910년 두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때도
변화가 없다가 1913년에 공포되고 1914년 4. 1에 시행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천군에 편입되어 북도면의 1개 법정리가 되었다. 당시 면사무소는
모도리에 있었다가 1929년부터는 신도리에 있었으면 다시 시도리로 옮겼다.
1960년 이후 법정리를 행정리도 분리하면서 옹암(독바위)을 장봉1리,
평촌을 장봉2리, 진촌을 장봉3리, 축동(싸리돌)을 장봉4리로 분리하고
1966년 부천군 조례 제135호에 의해 북도면 장봉출장소가 신설되어 1968년
8월 20일 장봉2리인 평촌에 설치하였고, 1973년 7월 1일 법률 제2597호에
의해 옹진군에 편입되었고,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
| |
|
|
| |
 |
 |
 |
버드나무깨화방 |
|
|
예낫 한문서당이
있던 곳으로 진촌서당이 버드나무가 있는
집 옆에 있어 ‘버드나무제’라 부르던 것이
변음된 것으로 보인다.
|
|
|
강신제밭 |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옛날에 밭을 개간하고
처음으로 농사를 지을 때 풍년이 들고 곡식이
잘 여물도옥 축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곳에 와서 잘 드시고 풍년이 들게 해달라고
‘강신제’를 지내던 밭의 이름이다. 우리
고유의 풍속으로 초경이 있다. 농사에 의존하던
시절 농사의 풍흉은 우리네 삶을 좌우했기에
대개 우수 경칩이 지나면 농사의 시작인
초경을 엄숙하게 행하였다. 소를 동족을
향해 세워놓고 멍에를 씌우고, 밭이 남북으로
길게 있으면 쟁기질도 남북으로 하지만 이
때만은 먼저 동서로 몇 골을 간 뒤에 남북으로
갈았다. 이 초경을 행하기 이전에 지신을
모시는 행위로써 강신제를 지내지 않았을까
추측하된다. |
|
|
|
|
|
절터골마루터 |
|
진촌
동쪽 마루터로 이 고개를 넘으면 평촌 절터골이 나온다 하여 부르던
고개 이름이다.
|
|
|
|
대빈창 |
|
진촌
북쪽 해안에 있는 포구로 손님을 기다려 인솔했다는 곳. 그러나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장봉 수군진이 설치되어 있던 조선조 당신
대빈창은 강화도와 교동을 주로 왕래하던 군항이었다 장봉진에서
사용할 구누수물자 등을 실어다 이곳 병기창고에 보관했기에 ‘대병창’이라
부르던 것이 변음된 것이다. |
|
|
|
매도래 |
|
대빈창
서쪽 뿌리를 부르는 지명. 옛날 강화도와 나룻배가 왕래하던 곳으로
썰물 때면 갯벌 위에 돌다리가 있어 이를 이용해 건넜는데 ‘매’는
돌을 뜻하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우리말의 ‘맷돌’을 줄여서
‘매’라고 하는 것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도래’는 한자
渡來(물을 건너온다)에서 연유한 것이다. |
|
|
|
소재 |
|
송사를
판결하던 곳으로 진촌 뒤쪽 대빈창 동쪽에 있다. |
|
|
|
당산
|
|
진촌
뒷산으로 옛날에는 연중 큰 행사로 온 마을이 정월 초순에 소나
돼지를 잡고 정성을 드려 풍년, 풍어,장수, 무병을 기원하던
서낭당이 있던 산이다. 지금도 이곳에서 당제를 지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
|
|
|
비석거리 |
|
거북이
머리를 든 형태의 바위로 강구지뿌리 서쪽에 있다. |
|
|
|
구두지
|
|
장봉3리
마을에서 북쪽 해안인 대빈창으로 넘어가는 언덕너머의 옛 지명.
대빈창은 강화를 왕래하던 포구였었다. 장봉진 진장들의 선정비가
이 곳에 어러 개 세워져 있었다. |
|
|
|
물옹거지(모롱구지) |
|
진촌과
싸리골 사이 산모퉁이로써 옛날 조수가 들어오거나 나갈 때 도랑이
물에 잠겼다 빠졌다 하여 붙여진 한자 지명.(가라앉을 ,물이
사방을 빙 두른 토지의 뜻인 , 짧은 뜻의 ) |
|
|
|
길청문 |
|
진촌에
수군진영이 있을 때 남쪽에서 수군의 진청으로 들어오는 정문이었다.
진촌 마을 앞 길목으로 진청문의 변음으로 보인다.
|
|
|
|
|
| |
| |
| |
|
| |
|
|
|
|
|
Untitled Document
|
|